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론 음모론 (문단 편집) === 노론 친일설 === 노론의 다수가 개화 이후 친일파로 변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주장. 대표적으로 [[여흥 민씨]]가 꼽힌다. 정치적으로 노소분규가 일었을 때 노론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던 민진후·민진원 형제가 바로 여흥 민씨이다. 또 민진원의 아버지는 [[민유중]]이며 민유중의 스승은 송시열이라는 논리. 그러나 이는 당시 조정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관료들의 출신과 [[위정척사]] 운동을 주도한 계층만 봐도 올바른 분석이 아님을 알 수 있다. 당장 위정척사파의 거두인 [[최익현]]을 비롯한 노론들 다수[* 다만 최익현과 그의 학파는 기반은 영남남인이었다. 그러나 노론 보수파의 반 양이적 사상에 공감해 노론에 학문적으로 속하게 되었을 뿐이다. ]가 [[위정척사]]운동에 관여되어 있었으며 친일파들은 주로 [[고종황제]]가 직접 키운 여흥 민씨 세도가문이나 개화파[* 사실 [[김옥균]], [[홍영식]] 등 1세대 개화파들은 실제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많았다. 하지만 단순히 친일 성향의 개화파가 아니라 [[친일반민족행위자]]라는 개념으로 들어가면 이 또한 벗어난다.] 등 기존 주류 노론과는 다른 이질적인 세력도 많이 있었다. 애초에 정치적으로 여흥 민씨의 세력이 강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파의 '의리'라는 측면에서 여흥 민씨는 절대 주류가 되지 못했다.[* 그리고 숙종-경종-영조 때만 해도 여흥 민씨 가문은 문제가 별로 없었다.][* 그리고 여흥 민씨 사람들이라고 해도 모두 친일을 한 건 아니다.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도 충분히 있다.] 주류 성리학자를 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. 누누이 서술되어 있지만 정치 영역으로 가면 이미 '성리학적 당색'이라는 것이 무의미하다. 이는 단지 노론 후손이니 노론이라 해버리는 것과 같으나 붕당 자체가 학문적인 의미가 뿌리를 두고 있기에 이 시기엔 노론이네 뭐네가 무의미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